중앙SUNDAY에 실린 장하준 교수 인터뷰.
미국발 금융위기가 글로벌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 금융자본의 작동 엔진이었던 신자유주의는 침몰 위험에 처했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구제금융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며 의회에 무릎까지 꿇었다. ‘팍스 달러리엄(미 주도 경제)’의 퇴조, 다극화, 큰 정부의 등장…. 신자유주의 이후 글로벌 경제는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될까. 한국 경제는 위기의 쓰나미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중앙SUNDAY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경제학) 교수를 e-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일찌감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경고하고 대안을 연구해 온 인물이다.
-중앙SUNDAY는 공적자금 투입 등 미국 정부의 전 방위 시장개입 선언을 ‘30년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도했습니다. 장 교수께선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지요.
“신자유주의의 파산선고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하기는 조금 이릅니다. 파산한 것은 틀림없지만, 역사적으로 파산한 체제가 절뚝거리면서 시간을 끈 경우가 많거든요. 예컨대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도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파산선고를 받았지만, 수정자본주의가 나와 이를 대체한 것은 20여 년이 지난 1950년께였어요. 세계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들이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고 얼마나 빨리 시스템 개선에 힘쓰는지에 따라 새로운 체제가 의외로 빨리 탄생할 수도 있고, 만신창이가 된 체제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며 상당 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지금 세계는 29년 대공황 직후에 버금갈 사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거대 금융자본의 독주와 양극화 심화 등이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폐해로 꼽히는데요. 앞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과연 이런 문제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월가의 자본 논리에 따라 다시 신자유주의로 복귀하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는 엘리트, 특히 금융 엘리트에게 너무나 매력적 체제이기 때문에 월가의 엘리트들이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과는 앞으로 1년 정도에 달렸다고 봅니다. 부실채권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커진다든지, 실물경기가 급격히 악화된다든지, 구제금융 과정에서 관련 기업의 탈법 행위가 많이 드러난다든지 해서 국민 정서가 급격히 악화되면 공화당·민주당을 막론하고 내년에 새로 들어오는 미국 정부는 규제를 크게 강화하며 신자유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작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로 일이 진행되면 월가의 엘리트들은 잠시 숨어 있다가 다시 나와 규제 강화를 방해하고 신자유주의를 유지하려 할 것입니다.”
-미국의 투자은행 시대는 과연 끝난 것입니까.
“투자은행들이 하던 일 중 많은 부분이 필요한 것이고, 따라서 누가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니 그런 의미에서 투자은행 업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80년대부터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들어 온 독립된 투자은행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투자은행들이 각광받은 것은 규제를 심하게 받는 상업은행과 달리 최소한의 규제만 받고 부채비율을 3000%까지 유지해 가며 고수익-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영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영업 방식이 잘못되어 미국 금융 시스템이 파탄 났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영업 행태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상업은행으로 변신하기로 했고요.”
-미국의 방종과 오만은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 낼 수 있는 우월적 지위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이번 사태로 달러의 신뢰는 더욱 크게 훼손됐는데요. 이는 어떤 파장을 몰고 올까요.
“기축통화국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급하면 돈 찍을 수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30여 년간 미국이 엄청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도 불구하고 버텨 왔던 것이지요. 과거에는 달러가 흔들려도 마땅한 대안이 없기에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지위를 유지하는 게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로화라는 분명한 대안이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국제거래가 유로화로 옮아갈 것입니다. 중국 위안화도 점차 위상이 높아지고 있지만 중국 경제가 세계적으로, 하다 못해 아시아에서도 맹주의 역할을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위안화 블록이 가까운 미래에 생길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번 사태에 대해 미국이 계속되는 모순을 ‘거품 돌려 막기’로 대응하다 한계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하셨는데요. 따지고 보면 이번에도 막대한 공적자금과 유동성 공급이란 거품으로 대응하는 것 아닙니까. 또 다른 거대한 거품을 잉태하는 것은 아닐까요.
“걱정스러운 대목입니다. 지금 미국 정부가 하는 일은 거품 돌려 막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급하니 이자율 또 내리고, 돈 풀고, 공적자금 투입하고 하는 것이니까요. 이런 대응 방식은 제가 얘기하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또 한 예입니다. 한국이 97년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시장주의’를 내세우는 미국과 IMF의 압력으로 금융기관의 4분의 1가량이 문을 닫았고, 이자율을 30%까지 올리지 않았습니까. 다른 나라에는 교과서적 시장주의를 하라고 해 놓고 자기들은 필요하면 시장주의고 뭐고 없는 것이지요. 이번 사태의 처리가 또 한편의 거품 만들기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미국 정부가 부실자산을 매입할 때 (시장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만)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해서 거품을 빼야 합니다. 어떻게 할지 두고 봐야죠.”
-한국은 이번에 변방 국가의 서러움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미국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도 한국 시장의 변동성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국제금융이라는 것이 묘해 중심부에 문제가 생겨도 주변부로 돈이 오지 않고 ‘그래도 중심부가 안전하다’ 하여 중심부로 돈이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히 중심부 금융회사들의 자금난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돈을 더 급격하게 빼내 갔던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특히 시장 변동성이 큰 것은 주식시장의 외국인 보유 비중이 유별나게 높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외자 유치에 의존한 금융발전 전략을 추구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외국인 투자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쉬운 나라’ 라는 인상이 박혀 있기 때문에 쥐고 흔들려는 외국인 투자자가 다른 나라보다 많은 것이죠.”
-한국의 입장에선 외환시장이 가장 약한 고리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적으로 달러가 약세인데 한국에서만 유독 강세입니다. 환율 결정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환투기 세력의 차단을 위해 어느 정도 규제적인 환율 결정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시각(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중앙일보 기고)도 있는데요.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환율시장을 통제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경제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신장섭 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
-이번 사태는 금융산업을 기본으로 돌아가게 하는(Back to the basic) 계기가 될 것이란 견해를 밝히셨습니다. 한국의 금융산업이 나아갈 길은 무엇일까요.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은 계속 유용할까요.
“제가 금융자본주의의 실패를 얘기하는 것은 결코 금융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금융 없이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금융 없는 제조업의 성장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간 한국 금융은 실물을 희생하는 (이제 파산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치달아 왔습니다. 동북아 금융허브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상인데, 그나마 우리가 20∼30년 대계를 세워 인력을 양성하고 인맥도 만들고 하면서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규제 완화해 외국 금융기관을 끌어 들여 그들 덕으로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금융허브는 설사 생긴다 해도 3류, 4류밖에 안 될 것입니다. 바람직한 금융은 실물과 연결된, 그리고 무엇보다 실물 부문의 확장을 돕고 그에 힘입어 자기도 확장하는 그런 금융이어야 합니다.”
-미국 경제가 앞으로도 2∼3년 더 고생해야 이번 사태를 수습할 것이라고 전망하셨는데요. 한국 경제는 언제나 회복할까요.
“2∼3년 돼야 수습된다는 것이 2∼3년 후에 2007년 이전 상태로 복구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한국도 미국 등 세계 경기가 회복되기 전에는 힘들겠지요. 만일 우리 자체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면 더 어려운 상황이 올 것입니다. 아직 주식시장에 거품이 남아 있고, 부동산 시장에도 거품이 끼어 있습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가계부채 문제입니다. 국민소득 대비 가계부채가 9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인 영국·미국(100%대)에 육박합니다. 실업 증가나 금리 상승 등으로 이자 상환 부담이 늘어나면 주택담보대출 상환 능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미치게 되면서 부동산시장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세계적 금융위기 상황에서 500만 호 주택 건설 같은 정책을 발표했는데요. 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평가하신다면.
“지금 세계의 금융 및 부동산시장이 무너지고 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금융 규제 완화와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서는 정부를 보면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정부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투자은행업·부동산을 통한 경기부양 등)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온 세상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특히 목적지로 잡은 곳에는 홍수가 나고 벼락이 쳐 쑥대밭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그곳에 빨리 가고 싶어도 폭풍우가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피신해 있다가 목적지의 피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끊어져 있지나 않은지 확인도 하고, 타고 가던 자동차 정비도 하고 난 다음에 가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정부는 한 번 정한 목적지이니 날씨와 관계없이, 목적지의 상황과 관계없이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자동차가 물에 떠내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어쩌겠습니까.”
-얼마 전 정부가 내놓은 감세 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금이 낮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세금이 국민소득의 12%밖에 안 되는 파키스탄은 경제가 잘 안되고, 국민소득의 50%가량을 세금으로 내는 핀란드가 미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습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세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세금을 걷어 얼마나 잘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감세해 주면 그 사람들이 투자도 하고 소비도 하여 그것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이론이 있지만, 문제는 실제 그렇게 된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경제 수준에 비해 세금 부담이 낮고, 특히 사회복지 지출은 더 낮아 정부 재정지출이 소득 재분배 기능을 거의 못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감세를 하게 되면 결국 정부 지출을 줄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복지 예산 등 ‘약자’를 위한 지출이 줄어들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의도는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장 교수께선 대기업(재벌)의 장점을 살린 한국식 경제발전 모델을 주창해 오셨는데요. 이번 사태를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단기적으론 수출시장의 다변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비교적 이번 금융위기의 영향을 덜 받는 나라들이 있는데, 이런 나라들로 눈을 돌려야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기적 기술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 기업들은 예전에 비해 투자와 기술개발을 소홀히 해 점차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조업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결국 허상인 것이 드러났지만) 금융산업이 고수익을 가져온다고 인식되면서 재벌들까지 서둘러 금융업에 진출하려고 자기 본업을 소홀히 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기업 발전, 경제 발전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꾸준히 기술력을 높이지 않으면 결국 도태됩니다. 기술개발은 자금력과 국제적 안목을 겸비한 대기업들이 주도해야겠지만, 제조업의 고질적 취약 분야인 부품-소재 산업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기업들은 연관 중소기업들을 재정적·기술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금산분리(기업의 은행 소유 제한)를 완화하려 합니다. 금융산업이 외국 자본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 산업자본이 은행에 투자할 길을 터야 하지 않을까요.
“금산분리 완화에 우려를 표명하는 분들은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화하는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도 보완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재벌들의 소유지분이 (합쳐서) 아무리 많아도 재벌이 임명하는 이사가 40%를 넘을 수 없게 한다든지, 그것도 걱정되면 비재벌계 지분으로 임명되는 나머지 60% 이사도 재벌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으면 임명이 안 되게 하는 등의 장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 재벌들이 제조업을 버리고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합법적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금융자본화가 많이 진전되었는데, 이들이 금융에 몰두하면 우리 경제의 활력은 더 떨어질 것입니다.”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돈의 쏠림’이 문제였고, 쏠림은 반드시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미국의 주택 버블 붕괴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지난해 한국에선 주식 및 펀드로의 자금 쏠림이 심했고, 이로 인해 많은 투자자가 고통받고 있는데요.
“은행이나 증권사들이 고객에게 ‘계속 올라갈 것이다’ 하여 증권 투자를 부추긴 것은 업계의 성질상 그렇다 해도 정치 지도자들까지 나서서 증권시장을 띄웠기에 국민이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임기 말년에 경제가 허덕이는데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주가가 2000이 되었으니 경제가 잘되고 있다고 우겼고,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운동 중에 2008년 말까지 주가지수가 3000이 되고 임기 말에는 5000까지 간다고 장담했습니다. 자본주의 역사 300년 동안 수백 번의 금융시장 거품이 있었고, 그때마다 ‘이번엔 다르다’고 했지만 결국은 거품이 터져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경제에 남긴 교훈을 정리해 주시죠.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추구해 온 신자유주의 노선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노선은 우리 경제의 성장, 안정, 고용, 평등 모든 면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그 본산지인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한계가 드러나 노선을 심각하게 수정할 태세입니다. 우리만 독야청청 그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